“국내 1000여 개 바이오기업 모두 잠재적 매물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 코스닥시장 상장 바이오업체 대표의 말이다. 자금난 장기화 여파로 신약 후보물질(파이프라인) 구조조정, 유휴 장비 매각, 인력 감축, 임상 중단 등으로 연명하는 바이오기업이 인수합병(M&A) 시장에 사실상 ‘떨이 매물’로 나오고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 알테오젠, 유한양행 등 일부 ‘스타’ 제약·바이오기업이 최근 주가가 급등하는 등 주목받고 있지만 대다수 바이오기업은 고사 직전에 내몰렸다.
1일 한국바이오협회에 따르면 중고 바이오 장비 직거래 마켓에 의약품 보관용 냉동고, 세포배양기, 고속원심분리기 등 58건의 매물이 나와 있다. 5개월 전(34건)보다 70% 증가했다. 협회가 운영하는 이 마켓에 올라오는 중고 장비 매물 건수는 바이오 업황 바로미터의 하나다. 한 바이오기업 연구원은 “의약품 보관용 냉동고와 세포배양기 등은 바이오기업이 서너 대씩 보유해야 하는 기본 장비”라며 “최근 현금이 급한 나머지 이런 기본 장비마저 내다 파는 곳이 적지 않다”고 했다.
연구실마저 폐쇄한 무늬만 바이오기업인 곳도 한둘이 아니다. 항암제 신약개발사 A사와 메신저리보핵산(mRNA) 신약개발사 B사는 벤처캐피털에서 수백억원의 투자를 받아 유망 기업으로 주목받았지만 추가 투자 유치에 실패하면서 최근 직원을 모두 내보내고 대표 혼자만 남은 1인 기업이 됐다. 한 회계법인 대표는 “이대로 투자 경색이 지속된다면 연말에는 국내 1000여 개 바이오회사 중 절반가량이 사실상 사업을 중단한 ‘휴면기업’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바이오벤처의 자금줄인 벤처캐피털 투자는 살아날 기미가 없다. 한국벤처캐피 탈협회에 따르면 국내 벤처캐피털의 바이오·의료 신규 투자는 2021년 1조6770억원에서 지난해 8844억원으로 2년 만에 절반 수준으로 급감했다. 올 들어 7월까지 5929억원에 머물렀다. 이승규 바이오협회 부회장은 “블록버스터 가능성이 있는 수많은 신약의 씨앗들이 자금난 때문에 안타깝게 사장되고 있다”며 “바이오 투자 생태계를 되살릴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1일 국가임상시험지원재단에 따르면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의 다국가 임상은 2020년 15건에서 2023년 31건으로 두 배로 증가했다. 글로벌 임상시험에 나서는 유망 신약 후보물질이 그만큼 늘었다는 의미다. 하지만 임상 건수 증가는 바이오기업에 비용 부담 요인이 되고 있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은 “신약개발이 잘될수록 더 많은 임상 비용이 들기 때문에 회사는 역설적으로 더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고 했다.
상장 바이오·헬스케어 기업의 1분기 연구개발비는 전년 동기 대비 3.6% 줄었고 연구개발 인력도 감소세로 전환했다. 일부 바이오기업은 자체 연구시설을 없애고 여러 기업과 돈을 모아 ‘공유 연구실’을 마련해 연구 기능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다.
국내 바이오산업의 자금 혹한기가 1~2년 더 지속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도 나온다. 한 회계법인 대표는 “우량 기업들도 장기전에 대비해 미리 ‘실탄 구하기’에 나서면서 어려워진 바이오회사들은 대부분 경영권을 내놓은 상태”라고 전했다.
일부 바이오 기업은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심정으로 투자 유치를 위해 경영컨설팅으로 둔갑한 ‘기업사냥꾼’ 세력과 접촉하고 있다. 한 벤처캐피털 대표는 “전과 이력이 있는 전주(錢主)는 뒤에 숨은 채 훌륭한 스펙을 가진 인재를 앞세워 영업을 하고 다닌다”고 말했다.
한국경제신문이 입수한 한 바이오기업의 컨설팅계약서에 따르면 기업사냥꾼 B사는 홍보비, 번역비, 출장비 등 비용 지급과 관련해 월 100만원 한도의 법인카드를 요구했다. 해외출장 시엔 일당 50만원과 별도의 비용을 요구했다. 한 벤처캐피털 대표는 “법인카드 발급 요구는 불법 소지가 큰 사안”이라며 “모 기업사냥꾼이 10개 바이오기업에서 한꺼번에 법인카드를 발급받아 쓴 사례도 봤다”고 말했다.
B사는 계약서에 착수금 1000만원과 월보수 700만원도 명시했다. 전환사채(CB), 신주인수권부사채(BW) 등 투자유치가 성사된 경우 성공보수로 투자유치 금액의 5%를 3영업일 내 입금할 것도 요구했다. 인수합병(M&A) 시에도 5~10% 수준의 수수료를 내야 한다.
업계 관계자는 “월보수와 성공보수를 동시에 요구하면서 업계 통상 수준의 2~3배로 정한 계약서는 처음 본다”며 “이런 ‘불공정 계약서’로는 회사가 금세 껍데기만 남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4090197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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